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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박사

정수 2005.11.25 19:04 조회 수 : 1693

유한대학 옆에 살면서 유일한 박사에 대한 관심이 생기더군요. 처음에는 유한대학 리서치를 하기 위해 알아보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분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유일한 평전'이 출간되어 나오기도 했죠.

나중에 책을 사볼까 하던 차에 메일로 받아보고 있는 '김진홍 목사의 아침묵상'에서 "깨끗한 자본주의의 본보기 유일한 회장"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해주더군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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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柳一韓, 1895∼1971) 회장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1895년 당시의 조선은 글자 그대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처지였던 때였다.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벌여 애꿎은 조선 백성들이 초죽음을 당하였고 나라 안에서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일어나 나라 사정이 날로 기울어져가던 때였다.

유일한 회장의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비단 장사를 하여 자수성가한 상인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도들이었던 그의 부모는 비록  배우지는 못한 분들이었으나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었고 정의감을 지닌 애국자들이었다. 일한은 어려서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 같은 글을 배웠고 서당공부가 파한 후에는 아버지의 비단가게에 나가 장사하는 요령을 몸으로 익혔다. 그리고 가족을 따라 교회에 나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그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가정교육이  남달랐다. 상벌제도를 아들의 교육에 적용하여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분별력을 높여주고 아울러 바람직스런 상도(商道)를 깨우쳐 주었다.
예를 들자면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킨 뒤 심부름을 잘못하면 일전(一錢)의 벌금을 매기는 것이었다. 만일에 아들이 벌금 낼 돈이 부족하면 새해 세뱃돈에서  추가 징수하였고 그래도 모자라면 일전에 찬물 한동이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대신하기도할 정도였다. 아버지의 이런 교육 탓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셈에 밝게 되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철저한 가치관을 몸으로 체득(體得)하게 되었다.

훗날 그가 언제나 뜨거운 겨레사랑의 정신을 지니고 선공후사(先公後私, 여러 사람을 위한 일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일을 뒤에 함)의 정신으로 살아 갈수 있었던 것은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몸소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불타는 애국심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철저한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배운 교훈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유일한(柳一韓 1895∼1971) 회장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때는 그의 나이 겨우 9살이었던 1904년이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를 유학길에 오르게 한 것은 그의 아버지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다. 비단장사를 하며 예수를 믿기 시작한 그의 아버지는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선진국의 발달된 문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설교를 익히 들으며 겨레 살리는 길이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자신의 아들이 그런 인재가 되어 주기를 바라서 9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학길에 오르게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갖도록 영향을 미친 사람들로서 당시에 3만이라 일컬어졌던 이승만, 정순만, 박용만 같은 애국지사들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젊은이들을 외국에 내보내어 새교육을 시켜 나라를 일으키는 일꾼으로 길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던 서재필 박사도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유길준 선생  역시 미국 유학 중에 얻은 지식으로 서유견문(西遊見聞)이란 제목의 책을 써서 국민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때다.

어린 일한이 유학을 떠난지 6년 후에 한일합방이 되자 일한의 아버지는 사업체를 다 정리하고는 평양을 떠나 북간도로 가서 독립운동에 재정지원을 하는 일을 뒷바라지 하였다. 그렇게 나라를 떠난 일한은 미국 땅에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학으로 시작하여 21년 만에  귀국하여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9살 난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려 할 때에 일한의 어머니는  며칠 동안을 식음을 전폐한 체  반대하였다. 굳이 아들을 그 먼 곳으로 보내려면 나를 죽이고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아들 일한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남편이 찾아가 집으로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일한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아내의 마음이 바뀔 때까지 기다릴 셈 잡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난 후 다시 처가집을 찾아가 아내를 설득하였다.

“자식이 우리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니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뒤에서 기도 합시다.”

일한의 어머니는 끝내는 남편의 말에 설득 당하여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는 데에 찬성하고 말았다.
1904년 봄 일한은 제물포항에서 가족들과 눈물로 작별하고 미국 행 배에 올랐다. 미국까지 한 달이나 걸리는 때였다. 배가 떠난지 얼마 후에 일한이는 아버지가 마련해 준 돈을 몽땅 도둑맞게 되어 완전히 무일푼의 아이가 되고 말았다. 상심해 있는 그를 같은 일행 중의 한 사람인 박용만(朴容萬) 선생이 어께를 두드려 주며 위로해 주곤 하였다.

“지금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직전이야. 앞으로 얼마 안가서 일본이 정식으로 조선을 합병하는 조약을 강요할 거야. 그러면 우리는 하로 아침에 나라를 잃고 말아 .우리나라 인재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먼저 실력을 길러야 해. 우리가 실력을 기르려면  일본보다 모든 면에서 앞선 미국으로 가서 배워야 해. 일한이는 아직 어리지만 미국에서 여러 방면에서 배우란 말이야. 일본인들이 조선땅에 세운 어떤 회사보다 더 크고 휼륭한 회사를 세워 나라를 살리는 것도 한 길이야.허지만 나는 아무래도 총을 들고 일본놈들과 싸워야겠어.그렇다고 무조건 싸우려 들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군사훈련을 하는 학교를 세워 투사들을 길러야겠어.”

“나도 그 학교에 들어가고 싶어요. 빨리 우리나라를 일본놈들 손에서 건져내고 싶어요.”

일한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하면 박용만 선생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격려해 주곤 하였다.



제물포항을 떠난지 한 달여만에 센프란시스코항에 도착케 된 일한은 미국 중부의 네브라스카주 커니(KEARNEY)란 작은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독신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는 한 자매의 가정에 마치 아들처럼 맡겨졌다.

두 처녀의 가정에서 그는 영어를 배우고 서양풍습을 배우며 미국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호기심이 남달랐고 모험심과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그는 고학을 하면서 초등학교부터 다시 시작하여 KEARNEY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1915년에 NEBRASKA 고등학교를 마쳤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식축구의 선수가 되어 팀 주장으로 선발되기까지 하였다. 그가  미식축구 선수 시절에 체득(體得)한 근성과 돌파력은 훗날 그가 기업가가 되었을 때에 개척적이고 진취적인 기업인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19년 고국에서는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그는 미시간대학을 졸업하고는 GENERAL ELECTRIC Company에 회계사로 취직하여 사회생활의 첫 발을 시작케 되었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사귀었던 중국계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胡美利) 여사와 결혼하였다. GE Company에서는 그를 동양 시장 개척을 위한 총지배인으로 키우려하였으나 그는 생각이 달랐다. 스스로 기업을 경영하여 자금을 모은 후 귀국하기로 결심을 하고는 회사를 사직하고는 식품회사를 설립하였다. 그가 선택한 사업은 중국요리에 쓰이는 숙주나물을 길러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그의 사업은 처음에는 판매가 부진하여 거의 파산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남다른 투지와 아이디어로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유일한(柳一韓 1895∼1971)이 미국에서 고학을 하며 대학까지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한 후 사업을 일으켜 성공에 이르는 동안 고국에 있는 그의 가족들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1910년에 합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의 아버지는 일본 땅이 되어 버린 조선에 더 이상 살기가 싫다고 가산을 정리하고는 식솔을 모두 이끌고 북간도로 이사 갔다. 이사를 가면서 미국 땅에 있는 아들 일한에게 다음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구나. 백성이 두 눈을 멀겋게 뜨고 나라를 빼앗겼으니 하늘을 우러러 볼 면목이 없구나. 우리 가족은 이제 이 땅을 멀리 떠나 북간도로 이사를 간다. 너라도 빨리 자라 이 민족을 위해 일해 주려므나.”

이런 사연의 편지를 받은 일한은 이 편지를 부여잡고 몇 날 며칠을 울었다고 전해진다. 북간도로 간 가족들이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편지하기를 고등학교를 마치면 북간도로 와서 가족을 도우며 나라를 살릴 일을 찾아보자는 연락을 보냈다. 그때가 일한에게는 대학 입학을 앞 둔 때였다. 일한의 생각은 그 상태에서 북간도로가게 되면 집안에도 별 도움이 되지를 못한체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차라리 집으로 돈을 보내고 자신은 미국에서 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보증을 서고 은행에서 100달러를 빌려 집으로 보냈다. 그 돈으로 아버지는 넓은 땅을  살 수 있게 되어 집안 사정이 한결 좋아지게 되었고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일도 한층 힘 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한은 그 돈을 갚느라 온갖 고생을 겪어야 했다.



일한이 식품회사를 창립한지 불과 4년만에 년 50만 달러의 큰 수입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케 되었다. 그의 집념과 창의력과 돌파력이 하나로 뭉쳐져 이룬 업적이었다. 그가 고국에 귀국한 1927년 3월 27일자 동아일보에 그에 대하여 다음 같이 쓰고 있다.

“자기의 창안으로 지금부터 6년 전에 적은 자본으로 ‘라초이’ 회사라는  (4백만 원)자산을 가진 대규모의 회사가 되었다는데 지금은 전 미국에서  ‘라초이’ 회사, 유일한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만큼 그 회사와 씨의 명성은 자자하다고 한다.”

그 무렵  일한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북간도에는 가뭄으로 인하여 기근이 닥쳤다. 하루 한 끼 식사조차 거르는 동포들이 나오다가 급기야는 굶주림으로 죽게 되는 이웃들까지 있게 되었다.
이에 일한의 아버지는 어느 날 마당에 가마솥을 걸고는 콩죽을 푸짐하게 수어서는 굶주리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와서 먹게 하였다.

아들 일한이 미국에서 숙주나물 장사로 번 돈으로 그의 아버지는 만주 땅에서 기근에 시달리는 동포들을 돕게 된 것이다.



1925년 일한은 고국 방문 길에 올랐다. 실로 9살에 고국을 떠난지 21년만의 고국 방문이었다. 그는 고국에 오는 길에 중국을 들려 숙주나물의 원료가 되는 녹두를 대량구입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때 그는 중국 상인들이 고급차를 굴리고 있으면서도 가게는 보잘 것 없이 허름하게 차려 놓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세금을 덜 내기 위해서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대국 중국이 조그마한 일본에 꼼짝없이 당하고 있는 이유가 이런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국민들이 세금을 성실하게 납부하지 않으면 그 나라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은 앞으로 어떤 경우든 세금만큼은 성실히 납부하리라고 그때 다짐하였다. 훗날 유한양행의 철저한 세금 납부의 기틀이 그때 세워진 셈이다.

그는 북간도로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에 고향인 평양에 들렸다. 21년만에 만나게 된 고향 사람들의 병약하고 무겁기만 한 표정들을 보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동포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약이 없어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았다. 기생충, 결핵, 학질, 피부병, 성병 등의 병들에 시달리고 있는 동포들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고국에서는 다른 어떤 사업보다 제약사업이 먼저 필요함을 느꼈다.

그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있는 가족을 찾아가 21년만에 부모 형제들을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기껏 콩나물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미국 가서 공부하라고 했더니만 그래 기껏 한다는 사업이 콩나물 장사야? 창피해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겠다. 콩나물 장사는 시장 거리 좌판에서 할머니들이 하는 거야. 내가 너를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 보낸 이유를 잊었느냐?”

“잊을리가 있겠습니까. 조국을 돕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가 되어 총칼을 들고 싸우는 것만이 조국을 돕는 길은 아니지 않습니까? 선각자들도 말씀하셨듯이 민족기업을 세워 경제 자립을 통하여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기래 무슨 사업을 하든지 늘 민족과 조국을 생각하고 신용을 잘 지키며 정직과 성실로 하려므나.”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알바이트를 해서 보낸 돈으로 마련한 대농장에 머물며 나라 잃은 동포들이 중국 땅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럽기 그지없음을 느꼈다.



유일한은 미국에서 학생시절부터 민족을 살리겠다는 애국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4월 14일로부터 16일까지 미국의 독립운동 발상지가 되는 필라델피아에서 조선인들의 대회가 열렸다.

고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호응하여 재미 조선인들이 열렸던 미국에서의 3.1운동이었다. 이 대회의 명칭이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였는데 이 대회에 이승만, 서재필, 조병옥, 임병직 등의 인물들이 모인 대회였다. 이 대회에 젊은이로서 참여하였던 유일한은 결의문 기초문안을 작성하는 대의원으로 뽑혀 활약하였고 대회시에 그 결의문을 낭독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그는 미시간대학의 재학생이었다. 그가 학생시절부터 가슴에 품었던 애국애족의 정신의 뿌리를 유한양행에서 발간한 『유한 50년』이란 책에서는 다음의 4 가지로 들고 있다.

1) 나이 불과 9세에 도미행을 결행하던 때에 나라를 사랑하는 큰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아버지의 간절한 염원과 당부가 어린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던 일
2) 감성과 지성이 가장 발랄한 때였던 청소년기에 미국의 가정과 사회에서 접한 기독교 정신과 개척 정신
3) 뜻을 같이하는 한국 유학생들과의 교분
4) 서재필(徐載弼 1864∼1951) 박사로부터 받은 감화  

이런 조건들이 그의 인격형성에 뿌리가 되어 그로 하여금 조국을 사랑하는 남 다른 마음을 품게 하였다.



일한이 1921년에 조국을 방문하게 되었던 당시의 겨레의 사정은 1920년에 창간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1924년에 창간된 시대일보 등을 중심으로 하여 민족의 자립경제를 일으키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강 이승훈 선생등이 주도하였던 ‘물산 장려운동’ 역시 같은 맥락의 운동이었다. 민족정신을 구현하려는 조선, 동아 같은 신문사들의 사회부 기자들이 앞장서서 국민들에게 자립경제 의지를 불러일으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일본이 그런 운동을 그냥 둘리 없었다. 1925년 4월 20일에 치안유지법까지 발동하여 언론 탄압 정책을 강화하였다. 결과로 조선일보는 정간을 당하게 되고 동아일보는 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그런 운동의 결과로 민족 기업들이 많이 세워지긴 하였지만 모두 다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일한은 고국 방문 길에 이런 사정을 살피고는 건실한 민족기업을 세우는 일이 다른 어떤 독립운동 못지 않는 애국운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때의 민족 운동가들이 세운 민족기업들이 좁은 테두리 안에서 국산품 애용 운동 같은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보고 자기는 세계로 뻗는 세계적인 기업을 세워서 일본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민족기업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1925년 고국 방문에서 돌아온 일한은 미국에서 ‘유일한 주식회사(New-Il Han & Company)를 설립하고는 서재필 박사를 사장으로 모셨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교포들에게 주식을 모금하고 직원들은 한국인들로 구성하였다. 특히 학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학생들을 채용하여 학비를 벌게 해 주었다. 고국 방문 길에서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고국 동포들의 모습을 눈으로 본지라 의약품을 주로 취급하는 회사로 발전시켜 나갈 구상을 하였다.
이런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고국으로부터 일한 부부에게 초청장이 날아왔다.
일한은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로, 아내는 호미리는 세브란스 의전 소아과 과장으로 일해 달라는 초청이었다. 이 초청을 받은 이들 부부는 초청에 응하여 고국으로 돌아 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유일한(柳一韓, 1895∼1971) 부부가 귀국을 결심하고는 서재필(徐載弼 1864∼1951) 박사를 찾아갔을 때다. 서 박사는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혹시나 그가 변절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다음같이 당부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지 말게. 변하지 말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던 33인 민족대표들 중 많은 분들이 훗날 변절하는 모습을 보아왔던 서 박사인지라 미국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을 결심한 일한 부부에게 그렇게 일러준 것이다. 그러면서 서 박사는 조각가인 자기 딸을 시켜 풍성하게 가지가 드리워진 버드나무 한 그루를 조각하여 선물로 주었다.
“이 버드나무처럼 민족이 편히 쉴 수 있는 큰 그늘이 되어 주게나”

서재필 박사가 이렇게 일러주며 주는 그 귀국선물을 그는 고이 간직하였다가 후에 유한양행 회사를 설립되면서 그 내용을 유한기업의 트레이드마크(trade mark)로 삼게 되었다.

귀국할 즈음에 그는 자신이 창업한 ‘라초이 식품회사’를 매각하여 자신의 몫인 25만 달러를 확보하고는 전액을 들여 의약품을 구입하여 고국으로 가져갔다. 귀국 후 일한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갈 것인가? 아니면 기업을 일으킬 것인가? 두 길을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결국은 원래 생각하던 바대로 기업 쪽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회사를 설립하고 회사이름을 유한양행(柳韓洋行)이라 지었는데 양행이란 말은 서양의 수입품을 취급하는 신식 상점을 일컫는 중국식 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유한기업이 한국 땅에서 깨끗한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기본정신을 기업 경영에 대로 반영한 바람직한 기업경영의 본보기가 되었다.



유한양행이 창립된 일자는 1926년 12월 10일이었다. 그렇게 창립된 회사는 1971년 3월 유일한 회장이 77세 나이로 타계 할 때까지 해마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튼튼한 민주기업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그 동안에 유한양행은 일제치하에서의 억압과 수난, 해방기의 극심하였던 혼란, 6·25전쟁과 4·19 혁명, 그리고 5·16 군사혁명등의 정치적 혼란과 온갖 시련을 극복하여 나왔다. 특히 유한기업이 다른 기업들과 달랐던 점은 온갖 정경유착과 탈세, 비리로 점철된 한국기업사의 소용돌이에서 유독 유한기업만큼은 일관되게 정직과 성실, 겨레와 백성들의 유익과 복지에 이바지하겠다고 기업의 공익정신을 지키며 정도(正道)를 걸어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직하게 기업을 경영하는 정도를 걸어왔으면서도 발전과 번영을 계속하여 나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성공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창업자 유일한의 강력한 추진력과 창조성과 도덕성, 그리고 개척정신에서 비롯된 열매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바탕에서 한국의 기업풍토에서는 가히 기적이라 할 만큼의 업적을 남겨 온 것이다.
이런 정신과 실천이 한국땅에 바른 자본주의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그간에 한국에서 기업하려면 정치권의 연줄을 대서 정치헌금을 바치고, 탈세하고 부동산으로 떼돈을 벌고 하는 등의 수단이 아니면 기업을 일으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국민들 사이에 은연중 자리 잡아 왔다.
그런데 유한양행의 경우가 그렇게 기업경영을 하지 않고 정도를 당당히 걸어도 기업을 얼마든지 성공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유한기업의 경우가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유일한 회장은 참으로 소중한 민족적 자산이요, 유한기업 역시 국가적 보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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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메일은 이것이고, 이후에는 그의 사상에 대해 연재될 예정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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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2회에 걸쳐 유일한(柳一韓, 1895∼1971) 회장의 일대기를 살펴보았다. 이제 그가 품었던 사상을 살펴보자. 그의 인생관 내지 기업경영에서의 사상을 크게 다음 4가지로 소개할 수 있다.

첫째는 청교도 정신(Puritanism)이다.
둘째는 실용주의 정신(Pragmatism)이다.
셋째는 애국애족(愛國愛族) 정신이다.
넷째는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 정신이다.

먼저 청교도 정신부터 살펴보자. 그가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가서 양자처럼 살았던 가정이 철저한 청교도 신앙을 가진 가정이었다. 본래 그의 아버지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였던 고로 그가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거니와, 그가 미국에서 교육받는 기간 내내 투철한 청교도 신앙을 지닌 가정에서 자라면서 청교도적인 신앙생활과 가치관으로 훈련 받았다. 청교도 신앙윤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개인의 경건한 삶이요,
둘째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이다.

‘경건’과 ‘책임’이란 두 축을 기존으로 하여 청교도 정신에는 4가지 기본 요소가 있다.
첫째가 정직과 성실한 삶이다.
둘째가 근면과 절약의 생활윤리이다.
셋째가 청지기 정신이다.
넷째가 소명(召命)으로서의 직업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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