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연세 YWAM 계좌번호 : 신한은행 110-293-670952 이미나

아프가니스탄 선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동현 2007.09.04 14:50 조회 수 : 1559

아프가니스탄 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순교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미 있어왔던 일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이슈가 된 계기는 바로 탈레반이라는 익히 알려진 단체가 피랍된 한국인들을 인질로 삼아 한국 전체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해석 이전에, 선교팀의 동기는 어떠했을까요..?



1. 그들은 사랑과 섬김을 위해 봉사를 떠난 팀입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2.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지키기 위해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주라)



3. 그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며..)



4.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최우선으로 삼으라는

명령에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는 자는 자기 형제와 부모 무릇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



5. 순교의 열매로 뿌려진 자들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되 자금 이래로 누구든지 주 안에서

자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는 그들의 수고를 멈추고

쉬게 됨이라..계시록)



6.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애통하는 자 였습니다.

주님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였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와 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크리스챤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바라며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일반적인  NGO단체가 봉사활동하다가 잡혔다면

이와같은 격렬한 비난이 있었을까요..?



문화적인 다양성을 무시한 선교활동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은 구원과 생명을 전하는 일입니다.

문화를 존중하느라 생명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문화는 이미 하나님을 원하지 않고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그럼 예수님은 왜 오셨으며, 바울은 왜 아레오바고 시에서

몸을 던지며 전도를 했을까요..?



그 모든 것이 사랑도 예의도 없는 부대뽀식 구식 전도였다는

표현에 속하는 것일까요..?



고린도 전서에서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오직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전하니 이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구원 얻는 자에게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능력이 되신다 ..고 적고 있습니다."



뒷 쪽에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나옵니다.. 전도는 성령님께서 직접 증거하시듯이,

사람의 눈에는 미련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도 미련한 것일까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지혜를 구하는

현대인에게 거리낌이 되고 있으며,

표적을 구하는 신앙인에게는, 거리끼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그들의 동기를 살핍니다.



사랑과 섬김의 동기로 십자가를 전하는 자를 결코

비난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복음에 대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일의 의미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말에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챤 선교활동을 향한 분노는, 이들의

허물과 과실에 있다기 보다는,



예수님의 복음이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자들은 그 진리에 순복할 의무가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자신의 영과 혼에 성을 쌓고서

자신의 믿음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며, 생명의 빛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여리고 성과 같은 죽음에 속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이 올때에 복음은 우리의 영과 혼을 거세게

부딪히며 충돌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신사적이지 않아서,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자유의지로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피흘림이 없이는 우리의 죄를 씻거나 부수실 수 없으며,

우리에게 진실을 보이실 수 없음을 알았기에..



십자가가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고, 모든 제자에게도

십자가를 따르는 길은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도 아니고, 예수님도 모르는 자들의 눈에는,

우리의 믿음은 무례하고, 독단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사랑과 섬김을 동기로 한 봉사에 대해 비상식적이고 악의적인 비난을 퍼붓고, 탈레반에 대해서는 조금의 분노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양심은 이미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그릇된 사망의 열매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도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시험하는 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수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이 된 것처럼,

참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다수결로 사람을

취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빛을 보고 자기 행위를 더 사랑하는 자는 빛을 떠나

어두움으로 나가게 될 것이며, 이 세대의 죄는 모두 이 세대가

담당해야 할 죄가 될 것입니다.





선행과 희생의 피가 뿌려진 현장에서 악한 말들이 오가는

순간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가라지와 쭉정이를

어떻게 가리고 있는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의 사람들의 헌신과 전도에 대해 성경에 기초한 대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보좌 옆에서 일어서서 스데반을 주목하셨던

예수님께서 배형규 목사님의 죽음 앞에서 혀를 차시고,

눈을 가리시고 그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셨을까요..?



그들의 봉사와 헌신의 발걸음을 어리석다고 하셨을까요..?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 누구보다

어리석어지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예수님은 분명 그들의 죽음을 영원한 생명책에 기록하고,

그들의 순교에 합당한 예우를 해주시며,



상급과 면류관으로 그들을 맞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만 있지 않고, 영원한 세상이 있으며,

영원한 세상에서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만 있으며, 이 세상의 이익만 따를

뿐이고, 귀찮게 하거나 성가시게 하는 것은 이기적인 눈으로

그저 싫을 뿐입니다.

도덕도 생명도 없는 판단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수를 셈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스데반의 죽음을, 합당하게 여긴 바울이

훗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돌이켜서

그 분의 사랑으로 자신의 영혼을 채우며 자신의 몸을 던져

헌신하였듯이..



그들의 거역과 반항에도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거역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중보하며,

축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순종이 필요할 뿐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우리에게는 평안이 있으나, 고난이 있으나,

의지할 주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명령 외에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크리스챤들의 평가를 눈여겨 보시며,

그들에게 순교와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마음을 느낍니다.

질문해보지 않은채 덮어두고만 있었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하고 때로는 분노하면서

어쨋든 그 질문들을 안고 주님께 돌아와서 모든 일의 의미에 대해서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성루에서 그 응답을 기다리는 주님의 신부된 교회로 서게 하실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여 그 질문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들을 바로새우시고, 깨우시며,

영적인 무장을 재정비하게 하시는 이유도 분명히 있을것입니다.

머지 않아 다가올 대선, 통일, 그리고 한국에 기름부으실 하나님의 마지막 세대에서의 엄청난 기름부음.

이 모든 것들이 한국을 향하여 선포하는 성령님의 말씀입니다.

이 모든 선물들을 받을 만한 깨끗하고 정결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저 질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은 저 질문으로 주님의 신부들을 시험하실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겠습니다..

피흘림이 없는 선교는.. 주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선교가 지향해야할 모델은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이지

지혜로운 선교의 결과가 아니며, 모델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또 다시 우리는 주님보다 지혜로운 자가 되어

주님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자의 자리에 서고 말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피흘림이 없는 선교는 피흘리는 선교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며,

피흘리는 선교사들이 무너뜨린 담과 경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은 결정적인 보루를 지키기 위해서 피 흘리지 않는 선교사들에게 얼마든지

전략적으로 자신의 땅을 내어주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결국에는 피 흘림으로 그 마침표는 찍어져야 합니다.

사탄이 더 이상 포기할 수 없는 보루에 왔을 때에, 이 세상에서 사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의 권세" 입니다..

그 무기를 쓰기 전까지는 어찌하든지 마음을 졸이며, 우리의 승리가 제한되도록 우리를 가로막겠지요..

하지만, 그가 "사망"이라는 무기를 들게 되지 않을 수 밖에 없을때.. 우리는

"부활"이라는 무기를 씀으로써.. 완전히 승리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완전히 설 수 있게 됩니다.

"부활"은 주님이 이루신 승리의 마침표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었다." 함과 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부흥을 여는 열쇠는 피흘림이었습니다..

우리는 피 흘림의 울타리 안에서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

부흥에 찬물을 끼얹는 피흘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과격한 선교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가속화 시키고

선교를 가로막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습니까..?

토마스 선교사는 볼품없이 죽었고, 그로 인해 대원군만 자극하고 선교를 막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의 작은 죽음이, 수만번의 선교를 모두 모아도 합할 수 없는 열쇠가 되어

영적 선교의 문을 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원군의 목숨은 잠깐이었고 토마스의 피는 영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의 피를 영원히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프간의 선교는 이번 팀으로 인해 막힌 것이 아니라, 모든 문은 열리게 되었습니다.

탈레반의 위협은 대원군의 위협마냥 귀여운 사탄의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도 그런 속임수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속임수는 사흘만에 부수어졌습니다.

하늘의 문은 피흘림 앞에서 영원히 열렸고, 지옥의 문은 영원히 닫혔습니다.

나라와 정세와 권세가 닫아놓은 외교의 문을 보지 마시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 나라에 열린 하늘의 문을 보았으면 합니다.

십자가로 정사와 권세를 벌거 벗기셨다..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길 바랍니다.


주님은 결코 신사적으로만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진리의 빛으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내셨습니다.

"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 고전 13: 6

주님의 사랑은 약한 자의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쪼록 형제들의 피흘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가 피흘림을 보며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 현장을 사모하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생각건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노라."

고전 -4:9-13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