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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의 대화... 오랜만에...

정수 2004.09.08 01:08 조회 수 : 1697

정말 오랜만에 아빠와 대화를 시도했다. 수업 시간에 등장했던 주제 중에서 아빠가 가장 관련 있을 것 같은 맑스 베버의 이야기를 꺼냈다. 결과는...

1시간이 넘도록 당신 이야기만 들었다. 1시간이 넘도록 내게 나의 생각이나 내가 왜 그런 물음을 물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 한 번도 묻지 않으셨다. 철 들고 나서 기억으로도 지금까지의 대화 중 단 한 번도. 내가 진로의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뜬금 없는 질문에 의문을 품었을 수도 있었으련만. 지식과 현재 정국, 당신의 생각들이 내가 이야기할 틈도 없이 속사포처럼 흘러나왔다.

그게 최선이었겠지. 알고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알려주는 것. 최선을 다해서 내게 알려주신 것이겠지.

하지만 결국 주제는 흘러 흘러 통일 문제와 안기부, 연좌제를 흘러 집안의 내력까지 나오게 되었다. 도대체 맑스 베버와 이북이 무슨 관계가 있는거지?

6.25때 이남한 우리 가족. 나름대로는 개성의 유지였기 때문에 작은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는 북한의 납북 대상 1호였다. 그 때문에 정치계에 진출하면 좋을 것 같다는 주위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정치와는 연을 끊도록 학생 시절부터 이야기하셨다고 하더라. 연.좌.제.

20년 동안 아버지와의 대화에서는 늘 과거의 아픔이 진하게 배어나왔다. 아니, 모든 주제는 그거였다. 어떤 물음을 물어도 항상 주제는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항상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 시간, 두 시간동안 듣고 있노라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질문은, '나보고 어쩌라고?'. 항의하듯 내게 묻는 그 물음을 이제는 외면하게 된다. 과거의 망령에 전부를 빼앗긴 삶. 이젠 아무도 남지 않았을 그 개성의 선산에 찾아간들 무엇 한단 말인가? 그것이 지금의 나와 아버지의 모든 대화의 주제를 앗아갈, 그래서 따뜻한 부자 관계, 그리고 풍성한 가정을 이룰 수 없도록 만들 권리조차 있다는 것인가? 그 때 가서 북한에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를 친척들을 만난들 무엇 할것인가? 아버지와 나와 어머니는 그 망령 때문에 이미 너무나 많이 힘들어했는데, 깨어진 그 가정의 모습은 그 때 가면 자연적으로 치유될까? 어머니와의 갈등 역시 이 문제와 엮여든다. 어머니는 모른다는거. 우리집안은 다르다는거.

나도 과거에 대한 피해망상에 시달리게 되어야 이 대화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을까?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아버지의 상처, 한. 왜 '집안'이라는 그 망령 때문에 대를 이어 과거의 일을 후손들에게 계속 가슴에 후벼파야 하는 것이지?

내 대에서는 그것을 소망으로 바꾸련다. 정말 통일이 되어 친척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후손들끼리 서로 만났을 때 울고 후회하고 통회하는 만남이 아니라, 연합되고 기뻐하고 위로하는 만남이 되도록 할 것이다.

대화가 아니었다. 울분과 한의 쏟아짐이었다. 20년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대화의 자리에 그것이 자리하게 될 것 같다.

주님, 언제까지이니까?

나의 첫번째 힐링. 그 대상은 아버지였다.
그 몸서리쳐지는 과거의 망령들. 그것에 계속 속박되어 있는 아버지의 모습. 더 이상 패기와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과거에는 총기를 가지고 있었을 그 모습을 보아오면서 내게 있던 울분을 끄집어내야만 했다.

아버지도, 나도, 서로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너무나 부족하다.
아버지... 아버지...

사실 그래서 처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도 참 힘들었는데.
아버지가 떠올라서.
미안함이 너무 컸는데...
너무 사랑스레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쳇, 왜 아버지에 대한 기도제목을 말씀하셔서 오늘 다시 케케묵은 그 낡은 것을 꺼내들게 하시는지...

내게 전체주의와 억압 구조, 전쟁과 광기에 대해 몸서리치는 분노와 증오를 심어준 그걸 왜 기억나게 하시는지.


싸이에 올렸다가 조금 덧붙여 여기에도 올립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들을 통해 한 가족됨이 무언지,
사랑과 희생, 헌신이 뭔지, 기다림이 뭔지,
대화와 관용과 용납이 뭔지 배울 수 있었어요.

사랑합니다.
혹시라도, 잠시라도 기억이 나시거든 기도해주세요.

p.s. 집에서는 찬양 잘 안듣는데, 안그래도 걱정하는 아버지가 음악 들을 때도 '광신'이라며 걱정하실까봐. 하지만 오늘은 흘러나오는 Once Again을 도저히 끌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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